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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雪嶽)을 뚫고 피어난 생, 산솜다리

고홍곤 야생화 사진작가 2025-06-02 00:00:04

수만 번의 찬바람 이겨내고 
기어이 피워낸 봉오리 
시련의 날들은 
소중한 담금질이었음을..



지난주, 나는 설악산 공룡능선의 산솜다리를 촬영하기 위해 1박 2일, 20시간에 걸친 긴 여정을 시작했다. 한계령을 들머리로 끝청과 중청을 향해 숨이 턱에 차도록 오르던 중, 앞서가는 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은 젊은 대학생, 혹은 직장인으로 보였고, 또 한 명은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늦장가를 간 부자 사이인가 싶었다. 

힘겨운 오르막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찰나, 어디서 왔냐는 나의 물음에 젊은이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일산에서 왔어요. 할아버지와 함께요. 올해 여든다섯이세요.” 여든 다섯에 설악산이라니... 놀란 마음에 또 물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시나요?” 대답은 놀라웠다. “대청봉이요. 오늘이 할아버지의 101번째 설악산 등반입니다.”


그 순간, 나는 작가로서 이 특별한 순간을 놓쳐선 안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동행을 청했고, 대청봉까지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렇게 나는 설악산 정상이 가까워질 무렵, 두 손자의 부축도 마다하고 스스로의 두 발로 묵묵히 산을 오르는 최인택 어르신의 101번째 등정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굳건한 발걸음과 흐트러짐 없는 눈빛, 그리고 정상을 밟는 그 순간의 담담한 미소는 나에게 한 편의 드라마이자 삶의 가르침이었다. 그날, 나는 산을 오르러 왔다가 한 사람의 생을 만났다.

▲ 101번째 설악산 대청봉을 완등한 최인택 어르신(가운데)과 손자, 필자 


대청봉에서 최인택 어르신과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낸 뒤, 나는 휘운각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중국 황산과 장가계를 합쳐놓은 듯한 공룡능선과 마등령을 지나 소공원까지 이어지는 20km의 여정을 계속했다. 거친 암릉이 굽이치는 공룡능선은 도전의 길이었지만, 설악산의 진면목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 험난한 길에서도, 겨울의 매서운 기운을 이겨내고 바위틈에서 피어난 산솜다리를 만나는 순간, 모든 피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오직 벅찬 감동만이 남았다. 한국의 에델바이스라 불리는 산솜다리는 고결한 사랑, 추억, 용기라는 꽃말을 지녔으며, 꽃을 보면 행운이 온다는 말도 있다. 혹독한 추위와 거센 바람 속에서도 바위틈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그 모습은 생명의 강인함과 희망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해주었다. 마치 세월과 구름, 바람이 빚어낸 공룡능선의 기암괴석 사이에서 이 작은 꽃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자 감사였다. 그 순간, 나는 꽃 한 송이가 전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산솜다리

야생화를 촬영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일은 때로 하루 5만 보 이상의 걸음과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하지만,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모든 수고를 감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거친 자연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나에게 큰 자신감과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공룡능선 곳곳에서 피어난 산솜다리는 마치 최인택 어르신처럼 삶의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희망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산솜다리는 생명의 끈질김을, 최인택 어르신은 불굴의 의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이는 단지 신체적 강인함을 넘어서, 삶의 목표를 향한 흔들림 없는 의지와 산에 대한 깊은 애정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나에게 산과 꽃은 언제나 삶의 나침반이자 충전소다. 묵묵히 길을 알려주고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는 존재들이다. 앞으로 내 삶의 여정이 공룡능선처럼 험난하게 펼쳐질지라도, 이 산을 오르며 품었던 마음가짐으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삶의 나침반이 흔들리고 충전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설악산과 그 안의 야생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오늘도 설악산에서는 꽃들이 피고 있다. 그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며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속삭여준다. 공룡능선에서 만난 산솜다리처럼, 그리고 85세의 최인택 어르신처럼, 우리도 삶의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찬란하게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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