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은 '기쁜 소식', '덧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덩굴식물이다. 이른 아침 햇살과 함께 꽃을 피웠다가 오후가 되면 시들어 버리는 특징 때문에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이라 불린다. 그 놀라운 생명력은 줄기를 잘라 물에 담가두면 뿌리를 내릴 정도이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는 존재다.
이제 환갑인 나는 뒤늦게 25년 동안 나팔꽃을 키우며 그들의 생명력과 함께 삶의 지혜를 배웠다. 생육 환경이 좋을 때는 전봇대를 타고 5m까지 올라가 많은 꽃을 피우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는 겨우 손톱만 한 꽃을 피우기도 한다. 10년 전, 베란다에서 일찍 여문 씨앗을 채취하지 않았더니 씨앗 하나가 툭 튀어 한쪽에 치워 둔 작은 화분에서 손톱만 한 꽃을 피워내고는 이내 져버렸다. 사람의 손길 없이 홀로 피어난 그 꽃을 보며 나는 미안함과 동시에 큰 울림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키운 꽃' 같았고, 어떤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말라는 신의 말씀처럼 느껴졌다.
▲천년의 약속, 보랏빛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시간
15년 전쯤, 그해 봄에 정신이 없어 나팔꽃 화분을 신경 쓰지 못했다. 촉수들이 엉켜 성장에 지장이 있을까 봐 조심조심 엉킴을 풀어주다가 그만 한쪽 촉수를 실수로 잘라 버렸다. 나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보름이 지나니 잘린 촉수 밑에서 새로운 촉수가 올라와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했다. 우리 삶도 때로 절망적인 터널일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희망의 촉수가 솟아나는 것처럼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믿는다.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
나팔꽃을 자세히 관찰하며 나는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팔꽃은 단순히 피고 지는 꽃이 아니었다. 이른 새벽, 피어나는 보랏빛 비행접시 모양 나팔꽃은 마치 지상에 새 생명을 태우고 오는 것 같았고, 해가 뜨며 오므라드는 나팔꽃은 간밤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하늘로 모셔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생명의 오고감이 하늘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나팔꽃은 나에게 있어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순환을 이야기해주는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다. 또한, 나팔꽃 새싹이 많이 올라왔을 때 미안한 마음에 솎아내지 못했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나팔꽃이 건강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간격을 두고 싹을 솎아내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모든 싹을 남겨두면 서로 간섭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하기에, 미안한 마음에 기도를 하며 몇몇 싹만 남겨두고 솎아내야만 했다.
우리 삶에서도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때로는 과감한 선택과 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팔꽃이 가르쳐주었다.
▲비바람 땡볕에도 가슴속 지지 않는 별 하나 간직하고 살아가는...
8년 전 제주도에서 겪은 경험도 이와 맞닿아 있다. 추석 무렵 첫 비행기를 타고 30만 평의 메밀밭 풍경을 촬영하러 갔으나, 태풍에 모두 쓰러진 황량한 들판만 남아 있었다. 해바라기 군락을 찾아 택시로 한 시간 거리인 렛츠런 파크에 갔지만, 그곳 역시 태풍과 폭염에 대부분의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숙인 채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풍경 속에서 나는 포기하지 않고 신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으려 한참을 헤맸다. 그때 나는 한 송이 나팔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했다. 폭염에 타버린 해바라기 줄기를 타고 꿋꿋하게 솟아오른 나팔꽃은 마치 "포기하지 마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좌절 대신 희망을 보았고, 가꾸지 않은 화분 속에서 홀로 피어났던 나팔꽃처럼, 우리 삶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끈질기게 피어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팔꽃이 주는 교훈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 움직인다. 10년전 9월 새벽, 베란다에 50여 송이 피어난 보랏빛 모습은 자연의 위대한 교향곡처럼 웅장한 감동을 주었다. 30년 전 일본 여행에서 본 건물 높이 올려진 나팔꽃처럼, 내 꿈 또한 내가 사는 모든 주변에 보랏빛 희망을 올리는 일이다. 한 번 핀 나팔꽃은 우리가 세상 소풍을 마친 뒤에도, 천 년 뒤에도 보랏빛 그리움으로 곱게 피어날 것이다. 나팔꽃은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과, 삶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깨닫는 지혜를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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